대회명 : 2026 세나 설악 그란폰도
대회 날짜 : 2026. 6. 20 토요일
날씨 : 섭씨 19도~21도, 많은 비
2025년 설악 그란폰도에서의 기록은 10시간 1분 43초였습니다. 목표였던 서브10까지는 단 1분 43초가 부족했습니다.
원래 저는 그란폰도에서 기록보다는 라이딩 자체를 즐기는 편입니다. 하지만 설악은 여러 차례 참가하면서 기록을 단축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지난해에는 목표에 거의 다가갔다가 아쉽게 놓친 만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오래 남았습니다.
사실 지난해 목표를 달성했다면 올해부터는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조금 더 여유롭게 설악을 즐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단 1분 43초의 차이가 오히려 다시 한 번 설악을 준비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겨울부터 다시 몸 만들기
지난해 하반기는 몸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체력뿐만 아니라 운동에 대한 의욕도 함께 낮아졌고, FTP 역시바닥까지 떨어졌었습니다.
겨울 동안에는 기초체력부터 가시 키우기 위해 실내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꾸준히 훈련을 이어가며 떨어진 체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중 설악 그란폰도 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원래 5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대회가 6월 20일로 연기되면서 준비 기간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추위가 유난히 오래 이어졌기 때문에 야외 라이딩도 4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달은 늦은 시작이었죠.
시즌 초반에는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몸을 만들었습니다.
- 2026. 4. 7 – 장거리 – 204km (1,040m) – 란도너스, 서울~영종 자전거 도로
- 2026. 4. 11 – 대회 – 125km (2,140m) – 원주 벚꽃 그란폰도
- 2026. 4. 18 – 업힐연습 – 100km (1,354m) – 동부고개 6개
- 2026. 4. 25 – 장거리 – 204km (1,255m) – 란도너스, 가오리 낚시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준비가 순조롭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시점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러닝 인터벌 훈련 중 무릎을 다치면서 약 2~3주 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통증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결국 준비하고 있던 5월 하프마라톤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올해 설악에서 기록을 노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준비를 여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무리해서 훈련을 이어가기보다는 회복을 우선으로 하고, 남은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습니다.
5월 16일, 한강 평지 라이딩(132km)을 시작으로 다시 자전거에 올라 몸 상태를 확인했고, 이후에는 장거리와 업힐 훈련을 조금씩 늘려갔습니다.
대회 전까지 진행한 주요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 2026. 5. 25 – 장거리 – 장거리 | 218km (2,620m) | 란도너스 – 단종 어드벤처
- 2026. 5. 30 – 업힐연습 – 151km (2,421m) – 동부고개 10개
- 2026. 6. 6 – 업힐연습 – 150km (2,477m) – 청평역~화악산 순환
이 훈련들은 단순히 거리를 채우기 위한 라이딩이 아니었습니다. 장시간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설악에서 필요한 업힐 능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데이터를 다시 분석하다
올해는 처음으로 지난해 라이딩 데이터를 자세히 분석해 보았습니다.
지난해 기록을 살펴보고 AI를 활용해 분석해 본 결과, 한계령까지는 파워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지만 마지막 역구룡령에서 출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
원인을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영양과 수분 부족, 그리고 더위 극복의 실패였습니다.
평소에도 갈증을 늦게 느끼는 편인데, 더위까지 더해지면서 필요한 만큼의 수분과 에너지를 충분히 보충하지 못했고, 그 영향이 라이딩 후반부에 한꺼번에 나타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라이딩 전략 자체를 수정했습니다.
평소에는 공구통을 물통 케이지에 장착했지만, 이번에는 안장가방으로 교체해 물통 두 개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 병은 물, 다른 한 병은 전해질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또한 갈증이나 허기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일정한 주기로 보급하기로 했습니다.
- 15분마다 물 또는 전해질 음료를 두세 모금씩 마시기
- 1시간마다 파워젤 1개 섭취하기
- 보급소에서는 물과 음식 모두 충분히 보충하기
마지막 점검은 6월 13일에 진행한 100km 무정차 Zone 2 라이딩이었습니다.
이 라이딩에서는 목표 파워 유지뿐 아니라 실제 대회와 동일한 보급 전략까지 함께 점검했습니다. 훈련 결과도 만족스러웠고, 영양과 수분 보급 역시 계획대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준비까지 마친 뒤에는 ‘이제 남은 것은 대회 당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
날씨가 왜 이래 …
대회를 약 일주일 앞둔 시점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쯤부터 해외 기상 모델에서 주말 강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라면 비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정도였고, 국내 기상청 예보에는 아직 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시점만 해도 ‘예보가 다시 바뀔 수도 있겠지’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화요일에는 해외 예보 대부분이 토요일 강수를 공통적으로 예측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시작되는 시각도 조금씩 앞당겨졌습니다.
오히려 비가 하루 정도 더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랐지만, 예보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목요일 저녁이 되자 국내 기상청도 비 예보를 발표했고,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예상 강수량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매번 예보를 새로고침할 때마다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조금씩 더 나빠지는 방향이었습니다.
더위를 준비했는데, 추위를 걱정하게 되다
사실 올해 준비 과정에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더위였습니다.
저는 더운 환경에 비교적 약한 편이라 지난해 라이딩 데이터를 분석하면서도 폭염 속에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대회를 불과 며칠 앞두고 고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더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장시간 라이딩했을 때 체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설악 코스는 긴 업힐도 많지만, 그만큼 긴 다운힐도 이어집니다. 비까지 내린다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질 것이고, 특히 정상을 지난 뒤 이어지는 긴 다운힐에서는 추위가 기록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심경이 참 복잡해졌다. 어떻게 더위를 극복할지 계획을 엄청 세웠는데, 반대로 추위에 대비를 해야 하다니…
결국은…
금요일 아침, 대회본부에서 공식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기상 악화로 인해 그란폰도 풀코스는 운영하지 않고 메디오 코스만 진행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식 발표를 보니 허탈함이 훨씬 크게 다가왔습니다. 몇 달 동안 준비했던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겨울 내내 실내 훈련으로 체력을 다시 만들었고, 무릎 부상으로 계획이 틀어졌지만 다시 회복해 장거리와 업힐 훈련을 이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지난해 아쉬웠던 서브10을 다시 도전하기 위해 여러 부분을 수정하며 준비했기 때문에, 풀코스 취소 소식은 더욱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지난 4월부터 대회 전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날씨가 좋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왜 하필 설악 대회 당일만 비가…’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인제로 향하다
한동안은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미 목표했던 레이스는 사라졌고, 예상 강수량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을 넘어야 할 시간대에 시간당 20mm 가 넘는 비 예보가 있었죠.
하지만 숙소 예약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무엇보다 현장에 가지 않으면 더 큰 후회가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라이딩을 하지 못하더라도 바람이나 쐬고 오자.’
그 정도의 마음으로 인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서울을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보니 자연스럽게 지난해가 떠올랐습니다.
2025년 설악 그란폰도 역시 대회 전날까지 비가 내렸습니다. 대회 당일에도 비가 예보되어 있었죠.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결국 정상적으로 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두 시간 정도 달려 인제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은 지난해에도 방문했던 돈가스집에서 해결했습니다.
같은 지역, 같은 식당, 같은 모텔. 그리고 지난해와 같은 양의 비… 마치 데자뷰 같았죠.
작년 이맘때도 이곳에서 ‘내일 아침이면 비가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회 당일 아침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지난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평소 대회 당일이라면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풀코스는 이미 취소되었고, 비도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실망으로 마음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준비도 평소보다 훨씬 느긋해졌습니다.
출발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기상예보를 확인했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제가 구룡령을 지나고 있을 시간대에는 시간당 20mm가 넘는 강수가 예보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메디오 코스라고 해도 출발을 포기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다시 확인해 보니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상 강수량이 시간당 약 12mm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여전히 비는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도저히 탈 수 없는 수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현장에 가서 생각해 보자고 생각하며 대회장으로 출발했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가장 큰 고민은 더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습니다. 비를 맞으며 긴 다운힐을 내려와야 하는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체온 유지였습니다.
저는 추위도 잘 타는 편이라 복장을 조금 더 보수적으로 선택했습니다.
하의는 평소 사용하던 얇은 빕숏 그대로 입었습니다. 젖더라도 비교적 빨리 마르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상의는 나시형 이너 위에 간절기용 긴팔 저지를 입고, 그 위에 질렛과 얇은 레인재킷을 겹쳐 입었습니다.
머리가 젖으면 체온이 빠르게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헬멧 안에는 비닐을 적당히 잘라 넣었고, 복부에는 핫팩도 붙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우중 라이딩을 몇번 한 적이 있기에 겪었던 겸험에 맞추어 준비를 했죠.
일단 대회장으로…
숙소에서 조금 늦게 출발했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참가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크게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대회장으로 향하는 차량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결국 대회장 바로 앞까지는 들어가지 못했고, 오미재 입구 근처에 차를 세운 뒤 자전거를 준비했습니다.
잠시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반대로 조금씩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는 참가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예보를 확인했습니다. 시간당 강수량은 조금 더 낮아져 있었습니다. 피크 타임 강수량은 시간당 8mm 까지 낮아졌습니다.
‘이 정도라면 탈 수 있겠다. 일단 출발선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자전거를 꺼내 인제라이딩센터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타고 가자.’
풀코스를 달리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래도 출발하지 않으면 더 오래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최소한 추억과 평생의 안주거리는 남겠죠.

빗속에서 시작된 레이스
대회장으로 들어가던 중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습니다.
사실 이번 대회에는 저뿐 아니라 주변 지인들도 많이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이곳으로 출발한 사람들도 많았죠.
전날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출발을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국 저를 포함해 세 명이 라이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설악 그란폰도였다면 5천여명의 참가자들이 스타트라인을 가득 메우고 긴장감 속에서 출발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공식 출발 시간도 이미 지나 있었고, 많은 참가자가 출발을 포기한 덕분에 스타트라인은 한산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약 5천 명의 신청자 가운데 실제 출발한 사람은 1,100~1,2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빗속에서도 출발을 선택한 셈입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빠른 그룹에 합류해 팩을 타려 했겠지만, 이날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비가 오는 상황에서는 시야도 좁아지고 제동거리도 길어집니다. 저는 평소에도 우중 라이딩에서는 가급적 팩주행을 하지 않는 편이라, 이날도 처음부터 혼자 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출발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계속 때렸습니다.
첫 번째 업힐, 구룡령
약 38km를 달려 첫 번째 보급소에 도착했습니다. 함께 출발했던 지인 한 명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한 명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록의 의미도 사라졌고, 메디오 코스로 변경된 만큼 모든 보급소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래봤자 보급소는 두개 뿐이지만…

지난해에는 첫 번째 보급소가 너무 혼잡해 그대로 통과했지만, 올해는 참가자가 적어 필요한 음식과 물을 여유 있게 챙길 수 있었습니다.
보급을 마친 뒤 드디어 첫 번째 본격적인 업힐인 구룡령이 시작되었습니다.
구룡령은 약 6.4km, 평균 경사도 약 6%의 비교적 완만한 업힐입니다.
길이는 조금 길지만 경사가 완만한 편이라 일정한 페이스만 유지하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코스입니다.

(Photo by 동부MTB)
다만 평소 대회에서는 구룡령 입구까지 대부분 팩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이동하지만, 이날은 거의 혼자 달리다 보니 같은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덥지는 않았습니다.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천천히 리듬을 유지하며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 도착해 생태터널을 통과하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짙은 안개가 산 전체를 덮고 있었고, 체감상 시야는 20m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걱정했던 구간은 바로 구룡령 다운힐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속도를 내는 참가자가 많아 항상 긴장하는 구간인데, 젖은 노면과 짙은 안개까지 더해진다면 위험성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대회 운영진은 위험 구간마다 안전요원을 집중 배치해 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참가자들 모두가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평소보다 속도는 훨씬 느렸지만, 서로 충분한 간격을 유지하며 안전하게 내려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기록은 조금 늦어질 수 있어도, 이날만큼은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긴 다운힐을 마치고 두 번째 주요 업힐인 조침령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조침령
구룡령을 지나 긴 다운힐을 마치자 곧바로 두 번째 업힐인 조침령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업힐에서는 약 190W 정도를 유지하며 후반부까지 체력을 아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략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날의 컨디션에 맞춰 페달을 밟기로 했습니다.
조침령은 약 4.3km, 평균 경사도 10%가 넘는 설악 코스에서도 가장 강한 경사를 가진 업힐 가운데 하나입니다.

(Photo by 대박과수원)
몇 주 전 화악산 훈련을 다녀온 덕분인지 조침령이 생각했던 것만큼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원한 기온 덕분에 페이스를 유지하기는 지난해보다 수월했습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 사실은 크게 의식되지 않았습니다. 옷은 완전히 젖었고 신발에도 물이 가득 들어왔지만, 더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멈춰버린 갈림길
조침령 터널을 지나 한참을 내려오면 진동2교 삼거리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설악 그란폰도와 메디오 코스가 갈라지는 곳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우회전을 해서 쓰리재와 한계령을 향했을 길이지만, 올해는 우회전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도로를 막아 놓은 통제선을 바라보니 아쉬운 감정이 솟아올랐습니다.몇 달 동안 준비했던 코스는 그 너머에 있었지만, 올해는 갈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보급소
갈림길을 지나면 메디오 코스의 마지막 보급소가 나옵니다. 몇 년 만에 다시 들른 보급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란폰도 코스에도 이 정도 거리에 보급소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쓰리재 보급소는 거리상으로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쓰리재 보급소에서 제공될 예정이었던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피니시까지 남은 거리가 길지 않다고 생각해 하나만 먹었습니다.
하지만 라이딩을 마친 뒤에는 ‘하나 더 먹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오미재를 넘어 결승선으로
비 때문에 코스가 단축되었으니 혹시 오미재도 터널로 통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깐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운영진은 참가자들을 기존 도로로 안내했고, 마지막 짧은 업힐을 하나 더 올라야 했습니다.
경사는 제법 있었지만 거리가 길지 않아 부담은 크지 않았습니다. 오미재만 넘으면 사실상 피니시는 바로 앞입니다.
마지막까지 비는 한 번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침과 비교하면 빗줄기는 훨씬 약해져 있었고, 오히려 라이딩하기에는 조금 더 편안한 정도였습니다.
우중 라이딩이라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 완주 시간은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늦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기록을 확인해 보니 오히려 조침령 구간은 지금까지 참가했던 설악 가운데 가장 좋은 기록이었습니다.
역시 업힐에서는 더위보다 시원한 기온이 훨씬 유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보다 밝았던 결승선의 분위기
결승선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참가자들의 표정이었습니다.
힘든 날씨였지만 대부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날씨에도 출발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기록보다도 ‘오늘 끝까지 달렸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의미였던 하루였을 것입니다.
코스가 짧아진 덕분에 평소보다 여유도 생겼습니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행사 부스도 둘러보고, SENA 이벤트에도 참가했습니다. 함께 참가한 지인은 모자를 받았고, 저는 양말을 받았습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것도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설악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달렸더니 얼굴에 빗방울 마사지를 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피부가 조금 좋아진 느낌?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그 정도로 하루 종일 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아쉬운 점은 정상적인 설악 그란폰도 코스를 달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준비했던 목표를 제대로 시험해 볼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출발하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아쉬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비를 맞으며 달린 메디오 코스였지만, 그 안에서도 충분히 즐거운 순간들이 있었고 또 하나의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아쉬웠지만 너무 재밌게 탔습니다.
이렇게 2026년 설악 그란폰도도 마무리되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참가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정도 맞아야 하고, 컨디션도 만들어야 하며, 무엇보다 날씨까지 따라줘야 합니다.
취미로 즐기는 사이클링이지만, 장거리 이벤트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도 다시 느꼈습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설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마지막 숙제가 남아 있죠.
바로 우중 라이딩 뒤의 세차입니다.
자전거를 깨끗이 씻고, 장비를 모두 분리해 말리고, 체인과 구동계를 다시 정비하는 일까지 끝나야 비로소 대회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번 설악도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우중 대회 목록에도 한 줄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 2023 BWCK(브롬톤 대회) – 우중 단축 코스
- 2023 충주 그란폰도 – 우중 단축 코스
- 2024 수티스미스 도네폰도 – 우중 라이딩
- 2025 란도너스 브레베 ‘동돼지’ 200km – 우중 라이딩
- 2025 부여 그란폰도 – 우중 단축 코스
- 2026 설악 그란폰도 – 우중 단축 코스
이제는 정말, 한동안은 비 오는 대회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 대회에 GCM의 유명한 프리젠터인 올리버 브릿지우드(Oliver Bridgewood)와 코너 던(Conor Dunne)도 참가했다고 합니다. 가수인 샤이니 민호도 참가했다고 하네요. 좋은 날씨에 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여기까지 와서 호우 라이딩을 경험하고 갔겠네요.
by Simon
